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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드림/오이카와 토오루] 다시 고백하다

D hong 2015. 2. 14. 23:26

 세오 코하네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코하네는 방과 후가 되면 항상 향하는 곳이 있다. 학교 본관의 가장 높은 층, 복도 맨 끝 귀퉁이에 자리잡은 음악실. 그 곳은 그녀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다른 학생들 눈에 잘 띄지 않는데다가, 아오바죠사이에는 음악에 관련된 동아리가 없기 때문에 수업 시간을 뺀 대다수 시간은 비어있기 마련이었다. 혼자 노래 연습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코하네는 중학교 3년 내내 뮤지컬부 소속이었기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망설임없이 같은 부에 지원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입학하자마자 뮤지컬부가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했다. 그와 비슷한 합창부마저, 아예 음악에 관련된 동아리는 전혀 없다는 선생님의 대답에 그녀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친구가 연극부는 어떻냐고 물어왔지만 그건 노래를 안 하잖아, 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운동 강호 학교에 오는게 아니었다며 수 없이 후회하고선, 할 수 없이 그 어느 동아리에도 소속 되지 않은 채 귀가부를 택했다. 음악실은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다면 혼자라도 할 거라는 비교적 간단한 답을 내렸다.

 그 후로 매일 같이 음악실로 달려와 노래 연습을 하기도 하고, 종종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음악 감상을 하기도 했다. 오늘도 그럴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 때문에 코하네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야호~ 코하네 쨩~!"

 오이카와 토오루. 코하네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3학년 선배가 갑자기 등장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아오바세이죠 배구부의 에이스이자 주장, 게다가 얼굴도 나름 미남이니만큼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항상 마주칠때면 팬클럽을 몰고 다녔다. 시끄럽고 성가신 일은 딱 질색인 코하네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절대로 그와 엮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딱히 엮일 일도 없고…. 하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히 부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오이카와가 먼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저걸 받아줘야하나 망설이다가, 선배인데다가 주위 시선도 많은 만큼 아주 간단하게 인사만 주고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그게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허락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코하네 쨩'이라고 친한 사이마냥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더라.

 복도에서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있을 때 일부러 어깨를 툭 치면서 꼭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던가, 혼자 학교 정원 벤치에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한 쪽 이어폰을 뺏어 무슨 노래를 듣고 있냐고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일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둘이 무슨 사이냐는 둥 거의 취조를 당하다시피 했고, 오이카와의 팬클럽 여학생들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느라 아주 진땀을 뺐다.

 코하네는 그저 오이카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와는 아무 사이도 아닐 뿐더러 앞으로 무슨 사이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3월이 되면 졸업할 것이고, 코하네의 이상형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으니까. 한 달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져 있었건만 그가 음악실에 찾아오면서 최고였던 기분이 최악이 됐다. 오이카와를 향했던 시선을 다시 손에 든 이어폰으로 옮기고 천천히 엉킨 선을 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세요? 음악실까지 찾아오시다니 별 일이네요."
 "코하네 쨩한테 줄 게 있어서 왔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고는 순식간에 코하네가 앉아있던 자리의 앞자리로 와 앉았다. 손에는 선물받은 듯 어울리지도 않는 작은 핑크색 쇼핑백이 들려져 있었다. 의자가 놓여 있는 정반대 방향으로 앉은 오이카와는 코하네와 마주 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여전히 엉킨 이어폰 줄을 풀고 있던 코하네의 손 앞에 두었다. 갑자기 나타난 물건에 코하네가 어리둥절해져서는 내내 아래로 두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오이카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뭐에요, 이게?"
 "초콜릿."
 "…네?!"

 느닷없이 뭔가를 눈 앞에 들이밀더니 초콜릿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코하네는 자기가 지금 뭔가 잘 못 들은건가 싶었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니까."

 아, 오늘이 그 날이구나. 근데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거지?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건네주는 날이 아니었던가? 또 나를 놀리는건가,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 코하네는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발렌타인 데이는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날 아니에요?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왜 저한테 주시는지 모르겟네요, 그리고 이건 딱 봐도 오이카와 선배가 선물 받은 것 같은데…"
 "아니야."

 오이카와가 코하네의 말을 딱 잘랐다.

 "이건 내가 코하네 쨩한테 주려고 산건데?"
 "네?"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한 오이카와의 대답에 코하네가 또 다시 당황했다. 이번엔 그녀가 당황했다는 것이 얼굴 표정을 통해 모두 드러났다.

 코하네는 '초콜릿'이 담긴 듯한 쇼핑백과 오이카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생각했다. 아, 하긴. 요즘에는 가족이나 친구들한테도 많이 주지 않았던가? 의리 초콜릿이라던가, 우정 초콜릿이라던가. 반대로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자신에게 그런 의미로 초콜릿을 줄 명분이 없었다. 우정 초콜릿, 을 주고 받을만큼 자신과 오이카와가 친한 사이였던가? 마음 속에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커다란 의문 덩어리가 자리 잡았다.

 "귀여운 후배한테, 이 오이카와가 주는 거니까 코하네 쨩은 두 말 않고 받아야 해!"

 코하네가 잠시 벙쪄서 몇 초간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얼떨떨하게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순순히 받았다. 귀여운 후배… 라는 단어에 멈칫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동안 알고 지내면서 쌓인 나름의 정도 있었고,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그런 가벼운 의미라면 딱히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코하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는 초콜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단 것을 집착하리만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을 선물로 준다는 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엉킨 이어폰을 풀던 걸 옆에 두고, 조심스럽게 쇼핑백 안에서 내용물을 꺼내보니 두 손에 딱 잡히는 예쁘게 포장된 정사각형의 케이스에, 볼 모양의 초콜릿 여러개가 들어있었다. 코하네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 먹어봐도, 돼요…?"
 "그럼! 코하네 쨩이 기뻐해주니 다행이네."

 그제서야 자기가 기뻐하고 있음을 표출해버린 걸 알아챈 코하네가 잠시 뺨을 붉혔으나 이내 허겁지겁 케이스의 포장을 풀고, 입으로 초콜릿을 밀어 넣었다. 입 안에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행복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지금 껏 오이카와가 본 것 중 가장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두 개째, 또 세 개째, 입에 들어가는 초콜릿이 늘어날수록 코하네의 미소에서도 행복이 배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오이카와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스르륵 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코하네 쨩, 전에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한 적 있었잖아…."
 "아, 네 그랬었죠. 별로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장난치신 거였잖아요."
 "응, 확실히 그건 장난이었어. 그래서 오늘 다시 말하려고 이렇게 찾아 온거야."
 "아~. ……아? 네?"

 아무 생각없이 초콜릿을 우물거리면서, 초콜릿 하나를 또 집어 올린 코하네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오이카와를 향해 시선을 살짝 올렸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는 미소를 지우고 한 껏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코하네 쨩을 좋아해. 이번엔 장난이 아니야, 진심이야!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

 코하네에 손에 들려있던 볼 모양의 초콜릿이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르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침묵으로 채워진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