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야마 토비오] 12cm
학생, 직장인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거운 금요일 방과 후. 카라스노 고교의 학생들은 저마다 귀가를 위해, 혹은 부활동을 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오렌지색 햇살을 지닌 작은 소년도 자신이 속해있는 배구부가 활동하고 있는 체육관을 향해 총총 걷고 있었다. 소년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만면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교내 후문을 지나쳐 체육관과 이어진 연결통로를 지나가는데, 몇 명의 남학생 무리가 마치 무언가를 훔쳐 보는 모양새로 뭉쳐 있는 것이 보였다. 카라스노 배구부의 선배들이었다.
"선배들,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히익…! 히,히나타…."
어딘가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의 목소리에 남학생 무리가 화들짝 놀랐다. 그 중 머리를 아주 짧게 깎은 남학생이 냅다 소리를 지를 뻔 하다가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서야 목구멍까지 올라온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히나타라 불린 소년은 덩달아 놀랄 뻔 했지만 이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돌아와 질문을 이어갔다.
"다나카 선배, 뿐만 아니라 사와무라 선배에 스가와라 선배까지… 뭘 보고 계신거에요, 대체?"
세 명의 선배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르켰다. 히나타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 닿은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놀랐는지 순간 히나타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카게야마 잖아요? 쟤 어디가는 거에요? 오늘 배구 안하는 거에요?!"
"나도 몰라.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 하루 빠지게 해달라고 타케다 선생님께 말했다나봐."
히나타의 궁금증에 주장인 사와무라가 의문이 섞인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어차피 자율 연습이 예정 돼있던 터라 하루쯤 빠져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특히 카게야마가 누구보다도 자기관리도 철저히 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딱히 안 된다고 말 할 명분도 없었다고 하더라. 배구라면 껌뻑 죽을 녀석이 스스로 배구부 활동을 빼 달라고 하다니 놀랄 노 자였다.
"아, 저기 저 사람."
"여…여,여,여,여자다!!! 우읍."
스가와라가 '저 사람'이라고 언급한 사람을 다나카가 발견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사와무라와 스가와라가 급하게 입을 틀어 막았기에 망정이지, 학교 정문과 체육관의 거리가 꽤 된다고 해도 다나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라면 무슨 교내 방송 마냥 그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다 들었을 것이다.
학교 교문을 막 나서던 카게야마가 누군가를 향해 손인사를 건네더니 교문 기둥 뒤에 가려져 안 보이던 사람의 형상이 살짝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자였다. 깔끔한 사복 차림의 여자. 여학생은 커녕 같은 반 남학생들과도 유난히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카게야마 성격에 여자랑 선약이 있다고? 세 사람 아니, 히나타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은 생각치도 못한 광경에 기함해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천하의 카게야마한테 여자가 있었다니! 여자때문에 배구부 활동을 빠지다니! 후배에게 졌다고 생각한 걸까, 유독 그렇게 외치는 것 같은 다나카의 표정이 참 가관이었다.
배구부 부원들 사이에 작은 소란의 돌풍을 일으킨 주인공은 여자, 라고 하기에는 무척 앳된 얼굴에 소녀였다. 소녀는 카게야마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비오 군, 오랜만이야!"
활짝 웃으며 환대하는 소녀와는 반대로 카게야마는 손만 들고 짧게 인사를 해주었다. 무뚝뚝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녀늘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을 가득 담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 온 카게야마를 뚤어지게 쳐다 보았다.
"왜?"
"토비오 군…, 키가 엄청 커졌어."
"아."
소녀는 기억에는 분명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했던 시절의 카게야마가 있었는데, 어느 새 그는 얼굴을 한참이나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키가 자라 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여타 여학생들 틈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자신의 큰 키에 은근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남자 애들과 얘기할 때에 올려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와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작 1년 못 봤다고 이렇게 달라지다니, 아무리 사춘기에 배구 선수라지만 1년새 저렇게나 클 수가 있는건가? 소녀는 미간을 구기고 마음 속으로 온갖 의문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내 빠른 답을 낼 수 있었다. 토비오 군도, 남자구나.
"야 마나, 그만 쳐다 봐."
마나라고 불린 소녀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자 카게야마는 무안함과 동시에 내심 부끄러워졌다. 확실히 다른 학생들보다는 친밀해 보이는 사이지만 그래도 아직 사람을 대하는 게 많이 서툴러 보였다.
마음 속으로 자문자답을 하고 있던 마나는 부르는 소리에 정신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무례한 행동이라는 생각에 작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건넸다. 뭐 카게야마는 그런 거에 일일에 신경 쓸 성격이 아닐테지만.
두 사람 나름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고 싶냐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마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락실!이라고 외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가 나오자 카게야마는 왠 오락실이냐며 적잖게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그야 카페에 얌전히 앉아서 커피같은거 마실 성격은 아니잖아?"
요구르트라면 몰라도, 반박 할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히려 작게 수긍했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운동을 하는 몸이라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걸으면서 얘기하는 편이 훨씬 익숙했다. 썩 얌전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마나 역시 그랬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커피처럼 쓴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구르트처럼 새콤달콤한 게 훨씬 입에 맞았는데, 비슷한 음료야 많겠지만 요구르트 그 특유의 맛이 좋은 건지 두 사람다 평소에 다른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잘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중학교 매점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조차 각자 손에 요구르트를 쥐고선 100분토론 마냥 얘기를 했을 정도이니, 만약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 열정적인 토론이 계속 이어졌을 것이었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카게야마가 조용히 회상했다. 마나는 지금 껏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였다. 히나타보다도 먼저. 물론 요구르트 뿐만이 아니라 운동이나 기타 여러가지 면에서도 대화가 잘 통해서 중학교 때는 거의 형제 처럼 지내다시피 했던 것 같다.
카게야마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마나를 슬쩍 흘겨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녀석, 이렇게 작았었나?'
게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스타일을 바꾼 것인지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 카락은 자연스럽게 풀러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철 없던 말괄량이에서 한 층 성숙한 숙녀가 된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한동한 카게야마가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엔 슬쩍 보더니 이내 대놓고 쳐다보던 카게야마의 시선을 느꼈는지 휴대폰을 보던 마나가 고개를 홱 들었다.
"할 말 있어?"
"…아니."
"싱겁긴, 그러고보니까 토비오 군 키가 몇이야?"
"180인데?"
"뭐? 중학교 때 분명 170도 안되지 않았어? 10센치 이상이나 컸단 말이야!?"
"뭐… 그렇지."
"난 그대로인데…, 그럼 12센치나 차이나는 건가…."
마나가 부러움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중학교 때 마나의 키는 168cm, 카게야마는 169cm 였다. 그런데 1년 새 카게야마는 무려 11센치나 자랐다.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 1cm의 차이는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카게야마와 마나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여자로서는 제법 큰 키에 속하는 마나였지만 지금의 카게야마에게, 그녀는 어느 새 그 보다 작고 가녀려져 있었다.
정확히 1년하고도 조금 못 본 것 뿐인데 두 사람은 이미 어른을 향한 계단에 한 단계 성큼 올라가 있던 것이었다.
화제를 돌려서 마나가 이번에는 학교에 관해 질문해 왔다.
"고등학교에서 친구는 많이 사귀었어? 아! 그 히나타란 친구에 대해서 좀 말해 봐!"
마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도쿄로 이사 간 뒤에도 둘은 문자도 하고 통화도 할 만큼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사실 중학교 3학년 헌 해 동안 카게야마의 연락을 받을 때면 항상 굉장히 신경질적이거나 우울한 느낌의 기시감이 자주 들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겨울방학 동안에는 아예 연락이 끊겼을 정도이니 마나의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락할 수 없었던 건 미야기현 중학교 배구대회의 그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차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식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게야마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문자였다. 그 이후로 6개월간 예전과 같이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카게야마가 안심하고 즐겁게 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전화를 할 때마다 그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카게야마가 나름 신나게 카라스노 배구부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해 준 덕분에 마나는 이미 부원들의 신원을 다 꿰고 있었다. 때문에 미야기에 다시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히나타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반면 카게야마는 왜 여기서 히나타의 이름이 나오는지 갑자기 울컥 화가 치솟을 뻔 했다. 그러면서도 뜸들이지 않고 바로 히나타에 대한 연설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키랑 얼빵한 성격에 대해 보고 있으먼 답답하다는 둥 하여간 눈치가 없는 녀석이라는 둥 흉을 보는가 싶더니, 그런 녀석이라도 배구 실력과 배구에 대한 마음가짐 만큼은 인정해줄만 하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나는 지금 자신의 귀가 잘 못 된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 멈추더니 팔짱을 끼고 얼굴을 갸웃거리며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당황한 카게야마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정~말 내가 아는 토비오군이 맞는거야?"
"무,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가 아는 토비오 군은 그렇게 순순히 남을 칭찬하는 성격이 아닌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마나와 카게야마의 사이 거리가 한 뼘도 안 될만큼 가까워질 찰나 마나가 먼저 물러섰다. 카게야마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 끝에 꽃 향기같은 향수 냄새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러니까 더 만나보고 싶잖아. 왜 배구부 구경 안 시켜주는거야?"
"그야…!"
앞서 가는 마나가 불평하듯 던진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입을 뗀 카게야마는 순간 멈칫 했다. 왜 거절했지?
배구부를 구경시켜주는 것도, 부원들을 소개해주는 것도 무척 단순한 일이다. 히나타도 이미 자신의 좋은 파트너임을 카게야마도 인정했다. 마나와 인사시켜 주는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쉬운 걸 거절 했던걸까? 선배들한테 놀림 당할까봐? 선배들이 마나한테 관심 가질까봐? 마나가 히나타한테만 시선을 줄 까봐?
방금 카게야마는 마음 속에 무언가 저릿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저만치 앞서 간 마나가 횡단보도 앞에서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토비오 군' 하는 목소리와 함께 환한 미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야에 가득 들어올 만큼 선명해 보였다. 그 순간 카게야마는 자신의 거듭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어? 빨리 가자."
"아, 응."
카게야마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자 이상하다고 생각한 마나가 카게야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마나의 재촉에 카게야마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신호등 파란 불로 바뀌었다! 가자!"
마나가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말 없이 맞잡은 손을 지긋이 보다가 살짝 시선을 올려보았다. 마나가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웃어보였다.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이미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