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하고 캔 뚜껑 따는 소리가 짧게 울리더니, 단 숨에 목 뒤로 벌컥벌컥 음료수를 들이켰다. 이어서 '캬-'하는 시원한 끝 맺음까지, 모든게 정해진 순서 마냥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오늘은 특집 방송의 녹화가 있는 날이다. 인기 아이돌을 총 집합 시킨 방송이기에 아직은 신인이지만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스포트라이트와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스타리시도 게스트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장시간의 리허설이 끝나고 짧게 주어지는 휴식시간을 틈 타 쇼는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아직도 방송은 어렵기만 하다.
스타리시의 무대 외에,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하는 방송은 항상 긴장하게 되는 쇼였다. 대부분 하늘 같이 높은 선배들이기에 더욱 그랬다. 성격이 워낙 붙임성 좋고 자신감 넘치기에 다른 사람들은 설마 천하의 쿠르스 쇼가 긴장같은 걸 하겠어?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라 막상 속에선 천불이 나고 있는 것을 알 리가 없을 턱이었다.
그나마 그런 쇼의 속마음을 공감해 주는 건 같은 스타리시의 멤버, 어린 시절부터 단짝인 나츠키 정도일 것이다. 방금 전에도 쇼가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을 때 따라 나오려던 그를 한사코 저지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실랑이 끝에 겨우 떼어놓은 나츠키를 떠올리며 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있을 본 방송 녹화 생각에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 떨쳐지지 않는 긴장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느 새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음료수 캔을 버리려고 두리번 거리는데 한 쪽 코너 구석에 쓰레기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통 쓰레기통은 자판기랑 붙어있지 않나? 하고 잠시 의아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음ㅡ 굳이 저기까지 가기 귀찮은데…"
쓰레기통이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겠다. 조준을 잘 하면 던져서 골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쇼는 빈 캔을 든 오른 손을 허공에서 이리저리 저어보았다. 이만치에서 던지면 될까? 아니 좀 더 뒤에서 던질까?
"준비하시고ㅡ 쏘세요!"
깡! 하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음료수 캔이 쓰레기통 가장자리를 맞고 바닥에 구르자 쇼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할 수 없이 바닥 구석에 쳐박혀버린 음료수 캔을 주우러 다가가는데 쓰레기통 맞은 편에 위치한 비상구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정확히는 비상구 계단의 윗 쪽. 쇼는 순간 뭐에 홀린 듯이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층간에 위치한 창가를 통해 붉은 빛 노을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두 층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자 낯 익은 뒷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소녀가 계단에 앉아있었다.
"아이라?"
쇼가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불렀음에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밀려오는 의아함에 조심스럽게 계단 두어 칸을 더 오르니 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어폰 잭이 휴대폰에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는지 노래가 밖으로 새어 나와 쇼의 귀에도 다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쇼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그녀를 놀래켜 줄 요량이 되어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다가갔다. 측면으로 보이는 얼굴을 살짝 보니 마침 눈까지 감고 있었다. 장난기는 배로 상승했다. 평소엔 활발하면서도 성난 강아지 같은 모습인데 지금 그는 먹이를 향해 조용히 다가가는 고양이 같았다.
"와!"
"꺄악!"
앉아있는 아이라의 눈높이와 맞추기 위해 쇼도 무릎을 굽혔다. 그리곤 아이라의 어깨를 양 손으로 턱하고 붙잡자 그녀가 깜짝 놀라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비명을 질렀다. 거의 전 층계의 들릴 만큼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가 짧은 순간 확인한 그의 얼굴을 보고 아이라의 비명소리가 개미 구멍으로 쏙 들어가듯 순식간에 작아졌다.
"쇼…?"
생각치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아이라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연신 깜빡였다. 쇼는 햇살이라도 머금은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더니 그녀가 말 할 틈도 없이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전히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녀는 무슨 제스쳐인지 한 번에 파악하지 못 했으나, 이내 자신의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얼른 양쪽 귀의 이어폰을 뺐다.
그런데 분명 이어폰을 뺐는데 노랫 소리가 아직 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뭔가 이상해서 노래를 틀어 놓았던 휴대폰을 보니 이어폰 잭이 제대로 꽂혀 있지 않았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헐레벌떡 이어폰을 다시 꽂아넣고 듣고 있었던 노래를 껐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쇼, 설마 이거 듣고 온거야?"
"맞아. 정말 몰랐던거야?"
어쩐지 오늘따라 볼륨이 작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어폰 잭이 제대로 꽂혀지지 않았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라는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쥐 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ㅡ 창피해!"
"무슨 노래길래 그래? 처음 듣는건데?"
"그게…"
아이라는 왠지 집요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피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새 솔로 싱글로 나올 가이드곡이라고 답했다. 자기가 직접 작곡하고 곧 가사를 붙힐 곡이라서 가이드 곡도 직접 녹음했다고. 쇼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더니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를 잠시 정적의 공기가 메웠다.
"좋은 곡이던걸."
정적을 깨고 뜬금없이 쇼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라는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빈 말 아니고, 진짜 좋았다니까!"
정말로 진심인 듯한 그의 말에 아이라는 쑥스러워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곧 이어 쇼가 왜 여기서 노래를 듣고 있었냐고 물어왔다. 대기실에서 들어도 되지 않냐면서. 그 질문에 아이라는 멤버들 사이에서 혼자 이어폰 꽂고 있는 건 실례되는 일이라고 답했다. 게다가 자신의 솔로 싱글인 만큼 혼자 조용히 듣는게 집중이 잘 되었다. 굳이 이런 곳 까지 올라온 이유는, 전에 한 번 보았던 이 곳에 노을이 참 예뻤기 때문이다. 여기 앉아 들으면서 저 노을을 보고 있으면 가사가 생각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좀 처럼 노랫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던 그녀였다.
쇼가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맞장구를 쳤다. 자신도 하루카가 만들어주는 스타리시의 곡과, 개인 곡은 항상 직접 작사를 하는 만큼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그렇게 함께 이런저런 힘든 소리를 토로하다가 드디어 쇼가 어떻게 이 곳까지 오게 됐는지 얘기가 나왔다. 여긴 건물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아이라는 쇼가 어떻게 여기를 알아챈건지 굉장히 의아했다. 문득 노랫 소리가 그렇게 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아니, 잠깐 머리를 식히러 나온거야. 리허설 내내 긴장해버려서… 전부 하는 같은 선배들이잖아?"
쇼가 버리는 걸 까맣게 잊고 얼떨결에 가지고 온 빈 음료수 캔을 흔들어 보였다. 아이라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은 몇 번을 해도 어렵더라고. 편하게 하라고 해도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 말야."
"…"
"솔직히 뭐 하나 까딱 잘 못해서 여러 선배들 눈에 안 좋게 보일까봐 무진장 불안해."
"…"
"오죽하면 말 한 마디 하면서도 심기 건드릴까봐 조마조마 한다니까!"
"…"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라고 말 좀 해 봐."
"쇼, 나는 선배 아니야?"
"아."
아이라는 이미 데뷔한지 6년째를 맞이하는 연예인이었다. 가만히 쇼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살짝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 선배들이 무섭고 어렵고 불편하다면서 자신에게는 무슨 소꿉친구마냥 편히 대하지 않는가. 둘은 그렇게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자주 마주치며 친해진지는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이라는 아닌 걸 알지만 순간, 이게 날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 할 뻔 했다.
"게다가 내가 한 살 더 많은데."
"아이라는 다르지!"
"흠ㅡ 뭐가?"
"너는 그, 저기…"
정곡을 찌르는 아이라의 질문에 쇼는 말 문이 턱 막혔다. 머릿 속에 확실한 답이 떠올랐었는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한 참을 생각하는데 주머니 속에 휴대폰 진동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쇼는 살았다라고 생각하며 지금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앞에 있으면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곧 있으면 녹화 시작한다고 빨리 오라는 하루카의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물쩡 넘어갈 생각 하지마. 나중에라도 꼭 들을 테니까!"
쇼의 이마에 '안도'가 새겨질 틈도 없이 다시 곤란함이라는 글자가 써지고 있었다. 먼저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던 아이라가 갑자기 창가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쇼가 의아해 그녀를 보았다. 순간 아이라가 뒤를 돌아 쇼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해주자면, 그냥 즐겨! 그게 긴장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 반짝이는 노을 빛이 스며들었다. 쇼는 왠지 가슴 속이 이상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심장을 휘감은 것 같았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이미 노을 빛으로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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