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울 만치의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마도 며칠 전부터 날씨 예보에서 떠들던 태풍이 빅토리아 아일랜드를 강타한 것이리라. 에레브로 귀환하기 위해 나무 승강장에 도착한 이카르트와 리피에겐 하늘 배를 띄울 수 없는 비보만이 날아들었다.
그렇다고 마을로 다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여섯 갈래 길에서부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해 두 사람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 그 자체. 그런 그들이 안쓰러웠는지 머지 않아 작은 휴게실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승무원의 작은 배려였다. 곧 담요 두 장을 가져다 주며 태풍이 약해져 배를 띄울 수 있을 때까지 몸을 녹이고 있으라고 했다. 리피와 이카르트가 순서대로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승무원은 작은 목례를 하고 휴게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자 엄청난 정적이 감돌았다. 정전이 되었는지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창 밖 너머 들려오는 비바람 소리와 벽난로의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어두운 휴게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엣취!”
어색한 공기가 길어질 찰나 작은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피가 한 것이었다.
“너 그 새 감기 걸린거 아냐? 빨리 벽난로 앞으로….”
“괜찮, 엣취! 감기 같은거 한 번도 걸려본 적 없… 엣취!”
기침소리에 깜짝 놀란 이카르트가 리피를 얼른 벽난로 쪽으로 이끌었다. 어째 갈수록 기침 소리가 더 요란해 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먼저 벽난로 앞 소파에 앉힌 후 무릎에 담요를 덮고 이내 자신의 망토를 벗어서 등 뒤로 둘러 주었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신사적인 행동이 참 신기했지만 감기 기운에 머리가 살짝 비몽사몽한 탓이었는지 리피는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망토는 겉은 비에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안 쪽은 거의 말라 있었다. 따뜻한 느낌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카르트가 항상 착용하고 다녀서 인지 그의 온기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몸이 조금 따뜻해지니 정신도 한결 맑아져옴이 느껴졌다. 리피는 그제서야 불꽃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이카르트를 향했다. 같은 듯 다른 두 쌍의 호박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건 리피였다.
“그러고 보니까… 이카르트 씨의 스승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카르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입 안을 달궜던 커피는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삼켜 버렸다. 커피는 방금 전 승무원이 가져다 준 것이었다. 그는 지금 생각지도 못 한 그녀의 기습 질문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건 왜 묻냐고 살짝 핀잔을 놓았더니 리피는 그냥 갑자기 생각 나서 그랬다고 가벼이 답했다. 대체 그녀에게 누가 무슨 말을 한건지 한 껏 쏘아붙히고 싶었지만 애써 입을 꾸욱 닫았다. 그에게 있어 ‘그의 스승’이란 사람은 꽤나 아픈 손가락 이었으니까.
그렇게 입에 단단히 빗장을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다음 이어진 리피의 말이 그의 입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 만요. 전 그저 굉장한 미인에, 이카르트 씨의 첫 사랑이라고만 들어서… 조금 궁금했어요. 엣취!”
말을 끝 마치고 리피의 기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카르트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표정에선 분노와 불만, 당황의 세 가지 표정이 뒤엉켜있음을 지레 짐작 할 수 있었다.
“누, 누가 그딴 소리를…!"
“…호크아이 씨가…, 아! 그리고 사진도 꼭 들고 다니신다…고….”
리피가 슬슬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가장 앙숙인 상대의 이름을 호명하자 이카르트는 에레브에 돌아가면 반드시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애써 화를 참으며 자리에 다시 앉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미인. 뭐 그 건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고, 첫 사랑이란 말은 정정해 줘야겠어. 한 낱 어린 소년의 동경일 뿐이었지 첫 사랑은 무슨. 그리고 사진은 무슨 사진이야? 그 자식 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건지."
“아~”
이카르트의 호박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을 맴돌았다. 침착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말을 하는 내내 그는 단 한 번도 자신과 닮은 듯 다른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하지 않았다. 그가 전력을 다해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피는 그게 거짓말임을 단 번에 알아 챘다. 이제는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의 버릇이었다.
어린 소년의 동경이라… 보통은 그런 걸 첫 사랑이라고 하는거라구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한 켠이 씁쓸해져 목구멍 앞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앞에 놓여진 찻 잔을 들어 올렸다. 벽난로 탓인지 커피는 식기는 커녕 뜨거웠다.
리피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자 애꿎은 벽만 쳐다보고 있던 이카르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닿았다. 옆 모습으로 보이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모닥불의 빛을 받아 마치 황금과도 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느껴지는 시선에 리피는 고개들 돌렸다.
황금색을 띄는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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